갑갑한 한국배구 by 른밸

 공 가지고 하는 운동이라면 골프 빼고 다 좋아합니다. 배구도 예외는 아니죠. 어머니가 배구를 좋아하셔서 겨울 주말 낮에는 티비에서 배구만 나왔습니다(사람 많은걸 싫어하셔서 직관은 안하심). 7살 때였나, COCO'S라고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점이 있는데 거기서 임도헌 선수랑 하종화 선수 만나서 사인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두 살 어린 동생은 임도헌 선수 보고 울었더라죠. 임도헌 선수 그 무서운 얼굴로 난감해하면서 저한테 "동생이 뭐 좋아하니?" 하고 물어봤었죠. 돈이라고 했어야 하는데 아이스크림이라고 대답해버렸네.


 2002년하면 대부분은 월드컵을 기억하겠죠. 하지만 월드컵이 끝난 뒤, 아폴로 눈병이 찾아왔고, 그 다음에는 부산 아시안게임이 있었습니다. 월드컵 출전 선수들 병역혜택 이야기가 나왔을 때, 다른 종목에서 비교적 반발이 적었던건 아시안게임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홈그라운드의 이점 + 축구로 한껏 고조된 스포츠 열기 = 합법적 병역면제 이거죠.

 한국은 금메달 96개로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놀이는 항상 인기가 많죠. 배구와 농구에 쏠린 관심은 야구 못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종목 모두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무적이었던 중국을 이긴터라 기쁨이 남달랐죠. 남자 농구팀이 일으킨 기적같은 4강전, 결승전 승리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때 많은 선수들이 병역면제 혜택을 받았고, 이는 해당 종목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을까요?

 겨울스포츠의 양대산맥 농구와 배구는 2002년 후로 꾸준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 국내 프로리그 이야기가 아니라, 국제무대 경쟁력말입니다. 특히 배구의 추락은 드라마틱합니다. 아시안게임을 위해 우리 대표팀은 세계선수권 불참을 선언합니다. 일본, 중국은 예정대로 대회에 참여하면서 아시안게임에 2진을 내보냈고, 한국은 금메달을 차지합니다. 그 후 V리그가 창설되고, 한국배구는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세계정상 수준은 아니지만 측면 공격을 바탕으로 만만찮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시절은 이제 과거일 뿐입니다. 


 월드리그 12전 전패에 이어 AVC컵에서는 호주에게 지고 5위로 마감합니다. 선수 구타문제로 김호철 감독이 사임하고, 태릉 선수촌 입소가 금지되면서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데다가 주전선수 줄부상까지. 눈이 지지리 없기도 하지만, 배구팬 입장에서 이런 성적을 그냥 받아들이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대표팀 감독이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이라는 사실입니다.


 측면 돌파 -> 크로스 -> 공격수 마무리. 고전적인 축구전술입니다. 아직까지 유효하긴 하지만, 정확도가 낮은 측면공격이죠. 현대 축구에서 측면공격의 비중은 높습니다. 하지만 다른 전술- 이를테면 윙포워드의 컷인 & 풀백 오버래핑, 이대일 월패스를 통한 중앙공격 등등 다양한 공격전술이 발전했기 때문에 측면공격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줄창 사이드만 파봤자 중앙에서 대비하면 골 넣기가 쉽지 않죠.

 배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세터 토스에 이은 좌우 공격수들의 강스파이크는 대표적인 공격루트입니다. 레프트, 라이트 공격수의 타점과 스파이크 실력이 중요한 것 또한 예나지금이나 마찬가지죠. 이 전통적인 공격형태에 대항하는 수비전술이 발전하면서, 공격전술도 더욱 세분화되었습니다. 특히 네트와 거의 수평으로 날라가는 빠른 토스를 이용한 공격, 예전에는 C퀵(혹은 C속공) 요즘은 퀵오픈이라 부르는 공격이 각광받게 되었습니다. 축구로 말하자면 측면에서 가까운포스트를 향해 땅볼로 빠르게 밀어주는 형태가 되겠죠.

 강서브 -> 리시브를 흔들리게 한다 -> 토스가 흔들린다 -> 공격을 막아낸다 -> 좌우혹은 중앙으로 빠른 토스 -> 스파이크 득점

 세계배구 흐름은 대략 이렇습니다. 공격전술의 발전으로 리시브와 디그가 힘들어지면서 테니스같은 랠리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원샷 원킬. 성공 아니면 실패.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빠른 토스와 함께 퀵오픈, 중앙백어택 등 다양한 전술을 활용해 블로킹벽을 아얘 피해버리려고 노력합니다. 


 한국배구는 저 흐름에 정확히 역행하고 있습니다. V리그를 보실까요?

 서브 -> 안정적인 리시브 -> 좌우 공격수를 향한 높고 안정적인 토스 -> 강스파이크 -> 디그 -> 안정적인 토스 -> 스파이크 득점

 스파이크 자체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만, 나머지는 모두 세계 흐름에 역행합니다. 실점할지언정 리시브를 흔들 수 있는 강력한 서브 대신 비교적 정확도높은 서브, 세터에게 안정적으로 리시브, 중앙에서 좌우 공격수를 향해 언니 토스...결국 좌우공격수의 화력싸움이죠. 그리고 이 화력싸움에 우위를 보인 팀이 결국 경기를 가져갑니다. 예를 들면 삼성화재. 리시브 부담이 적은 라이트에 싸고 타점높고 손목힘 좋은 외국인 선수를 배치해서 다시 우승컵을 가져갑니다. 그 뒤로 줄줄줄 삼성화재의 길을 따라가고, 한국배구는 지들끼리 싸우다가 세계배구 흐름에 역행하게 됩니다.


위기의 한국 배구, 강훈련만이 해답 - 연합뉴스

[조영준의 클로즈 업 V] 인도에 지는 한국 배구…어쩌다 이렇게 됐나 - 엑스포츠


 "내 식대로 밀고 나가겠다"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빠른 배구를 무조건 추구하는 것보다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점을 살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신치용 대표팀 감독의 말입니다. 정신 못차렸습니다. 우리식이라는 수비배구. 잘만 구사되면 좋죠. 그런데 월드리그에서 우리를 상대하던 팀들 중 서브 리시브 제대로 하는 팀 많았나요? 수비 배구의 핵심인 안정적인 리시브와 디그는 이제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리시브와 디그의 불안정함을 기본전제로 깔고 세터들의 빠른 토스로 상쇄시키는게 현대배구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포트리스2 스카이맵에서 플레이하듯 곡사포같은 토스를 받아 블로커와 뚫느냐 뚫리느냐 싸움을 하는게 아니라 말이죠.


 배구가 더더욱 안타까운건 선수 개개인은 크게 뒤처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신진식-김세진으로 시작하는 세계적 수준의 측면공격수들은 김요한, 박철우 등등 지금도 꾸준히 배출되고 있습니다. 문제의 세터진? 대한항공에서 뛰는 한선수가 문용관 감독 시절 보여주었던 빠르고 재기넘치는 토스를 기억하시나요? 이번 아시아청소년대회에서 한국을 3위로 이끈 송림고 세터 이민규도 있네요. 리베로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예나지금이나 세계최강이니 패스.

 국내 지도자와 배구협회임원들은 위기의식을 느끼지도 않고 트랜드를 따라갈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V리그라는 조그마한 연못에 안주하며 말이죠. 연못이 좁다보니, 트랜드에 부합하는 빠른 배구를 펼치고 싶어하는 젊은 코치들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흐름을 따라가면 적어도 아시아에서만큼은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텐데 말이죠.


 배구대표팀은 아시안게임 3연패를 노리고 있습니다. 전 박살나면 정신 좀 차리겠거니 하며 지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그래봤자 협회니 감독이니 관계자니 정신 못차릴게 뻔하니까요. 그냥 3연패하고 지들끼리 룰루랄라 노래부르면서 세계배구가 뭔가요? 우리것이 소중한것이여 띵가띵가 춤이라도 추라죠. 유럽 스카우터들한테 잘 보여서 선수들은 유럽 진출해서 재미있는 배구하면서 지내구요. 겨울에는 유럽축구가 있으니까 저도 별 문제 없네요. 결국 배구팬들만 피해자네요.


P.S.배구판을 보면, 제가 축구를 좋아하는게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잡음은 많았을지언정 아직 생각있는 사람들이 많고, 좋은 선수들을 좋은 지도자가 지도하면서 좋은 성과를 낸 덕분에 세계 흐름에도 많이 뒤처지지는 않고 있으니까요. 히딩크는 말할 필요도 없고 니폼니쉬, 비쇼베츠, 포터필드, 귀네슈같은 해외 지도자들은 국내 축구인에게 신선한 충격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위에 계신 분 정신 못차리기는 여전하지만...쓰고보니 결국 판 크기가 문제네요.

P.S.2 단조로운 배구로 인해 팬들의 관심 급감 -> 스파이크 서브 규제...이러면 다시 수비배구가 각광받게 될 지도??...인셉션의 여파가 크구나

덧글

  • 동네 최씨 2010/08/11 00:05 # 답글

    농구는 해외 용병 도입 이후 오히려 토종 센터의 입지가 줄어들어버려서 여전히 국대 센터라고 하면 마지막 승부 세대의 선수 서장훈이 아직도 국내최고... 거기다 하승진 정도. 그게 가장 문제인 듯 하고요.

    배구는 솔직히 네덜란드나 러시아, 막 이런데 보니깐 체격이랑 힘 차이가 워낙이 많이 나서 스파이크 타점이 워낙 높으니 블럭하러 떠봤자 그위에서 때리고... 근데 대략적으로 비슷한 일본이나 이런 나라한테까지 밀리기 시작하는 걸 보면 마음이 안좋네요.
  • 른밸 2010/08/11 01:59 #

    신체조건에서 열세인건 어느 종목이나 마찬가지죠. 하지만 팀 플레이를 통해 얼마든지 메울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증명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배구고 농구고 일대일 맞짱 뜰 생각만 하고 있으니 될 턱이 있나요. 월드리그 나가서 남미나 유럽팀 이기는건 못봐도 좋으니까 이란, 인도, 태국 이런 팀이라도 확실히 잡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hk 2010/09/02 06:48 # 삭제 답글

    강만수 강두태 장윤창...이런 선수들이 활약하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 른밸 2010/09/10 16:15 #

    전설의 시절이군요 ㄷㄷㄷ 직접 본 적은 없어서;;
  • 2010/09/03 09:26 # 삭제 답글

    뭐라노!!!!
  • 른밸 2010/09/10 16: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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